(곰돌이의 까막눈 과학이야기 7)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망원경으로 제대로 별자리를 관측할 수 있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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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천재라는 표현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천재가 아닌 이유도 있겠지만(^^) 왠지 천재라고 표현하면 그 사람의 노력과 열정이 폄하되어지는.. 그런 뉘앙스가 있다. 물론 한 생애에서 잠깐(!!!) 반짝이는 천재는 있다. 하지만 이들은 진정한 천재가 아니다. 천재는 개인의 노력과 열정으로 후천적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1인으로서 갈길레오 갈릴레이는 정말 천재중의 한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 포스팅은 그의 천문학 분야에 대한 포스팅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천문학자이면서 의사이기도하고, 과학자이면서 물리학자이다. 아마도 이탈리아 태생중에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지 않을까?

그는 1564년 이탈리아 피사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수도원학교에 입학하여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이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의문을 품게된다. 후에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의사가 되기위해 공부하였고, 피사 대학에 입학후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맥박계'를 고안하였다. 후에 피사 대학의 수학교수가 된 갈릴레오는 '운동에 대하여'라는 책을 저술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낙체의 속도가 무게에 비례한다'는 이론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피사의 사탑에서의 낙하시험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갈릴레오가 실제로 이 '피사의 사탑 낙하 시험'을 한것은 아니라고 한다. 갈릴레오의 전기작가인 비비아니가 갈릴레오의 업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일부 과장된 부분이 들어갔는데, 실제 갈릴레오는 논리적인 추론으로만 아리스토 텔레스의 이론을 반박하였다고하니... 비비아니가 더 대단한 인물인건지... 참.. ㅎㅎㅎ

 

 

갈릴레오 갈릴레이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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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증명한 '피사의 사탑에서의 낙하시험'

 

이렇게 갈릴레오는 40대까지 천문학보다는 수학과 과학분야에 중점을 두고 학문을 연구했는데, 드디어 1609년 기존의 망원경을 계랑하여 천체 관측을 시작한다. 그는 화성의 위성이나 달의 반점, 태양의 흑점등을 발견하여, 당시 지배적 세계관이었던 천동설을 부정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성이 과학적인 주장임을 입증하게된다. 이런 갈릴레오의 지동설 주장은 앞으로 갈릴레오 인생에 있어서 그를 따라다니는 족쇄가 된다. 당시 피렌체의 대부호였던 메디치 가문의 코스모 2세는 그를 피렌체로 초청하여 관련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게된다.(메디치 가문..코스모 2세 짱...^^)

 

 

갈릴레오의 굴절 망원경의 탄생

 

갈릴레오는 1609년 인류 최초로 망원경을 이용해서 천체를 관측하게된다. 그가 만든 망원경은 '갈릴레오식 굴절 만원경'이라고 불리는데, 이 망원경은 현재의 주류인 케플러가 고안한 '케플러식 망원경'과는 달리 접안렌즈를 오목렌즈로 사용하였다. 이는 보이는 시야가 좁기 때문에 천체를 관측할 때 많은 불편함을 주었다. 그래서 현재 갈릴레오식 굴절 망원경은 소형 쌍안경이나 오페라글라스, 저사양의 망원경에만 사용되고있다.

 

참고로 '케플러식 망원경'을 고안한 요한네스 케플러는 케플러의 3법칙을 발견한 천문학자로 갈릴레오와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다. 독일 출생으로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이며 점성술사이기도한 케플러는 17세기 천문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천문학자이다. 하지만 이번 포스팅의 주제는 갈릴레오이므로.. ^^

 

 

갈릴레오가 고안한 굴절망원경(출처-한국천문연구원)

 

 

갈릴레오식 굴절 망원경은 경통이 막혀있기때문에 공기의 흐름으로 인한 상의 불안정이 없고, 콘트라스트 즉 성상의 명암이 매우 뚜렷하다. 이러한 장점은 행성이나 은하, 성운을 관측하는데 매우 중요한 장점이다. 하지만 다른 종류의 망원경에 비해 상당히 비싼편에 속하고, 렌즈가 전면부에 위치하기때문에 렌즈에 상처가 나거나 이슬이 맺히는 단점이 있기도하다.

 

로마 카톨릭의 탄압.. '그래도 지구는 돈다'

 

처음부터 갈릴레오가 로마 카톨릭과 척을 진건 아니었다. 본디 수학자였던 갈릴레오는 수학과 물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연구를 하던중, 1609년 군사적인 용도로 계량된 망원경을 발견하게된다. 그리고 점차 성능을 발전시켜 우연히 달을 보게되는데, 놀랍게도 당시 관측된 달은 그때까지 알고있던 매끈매끈한 달이 아닌 움푹파인 분화구와 울퉁불퉁한 표면을 갖고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이 진리로 통하던 시대였다. 코프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을 통해 지동성을 주장하였지만, 별다른 주목없이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로마 카톨릭은 1616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금서로 지정한다. 갈릴레이또한 카톨릭 교황청에 의해 이단으로 몰리며 종교재판에 회부되는데, 그는 결국 지동설을 입밖에 내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종교재판 후 8년여의 남은 여생을 가택연금을 당하다 임종을 맞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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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는 갈릴레오보다 100여년 앞서 지동성을 주장하다 쓸쓸히 죽게된다

 

 

우리는 이때 종교재판에서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입밖으로 내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며 혼잣말로 나즈막히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다고 알고있다. 사실일까? 사실 당시 종교재판은 갈릴레오가 과학자의 신념을 지키기위해 당시 거대 종교에 맞서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한다. 당시 교황청은 갈릴레오가 1632년 '두 가지 주요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라는 책에서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를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말라는 교황의 당시 결정을 어겼느냐가 중요한 쟁점이었다. 이때 갈릴레오는 오히려 코페르니코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서 그 책을 저술했다고 밝혔다. 당시 종교재판의 결과는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가설이 성경에 위대된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오가 이를 옹호한 점은 잘못되었지만, 그 입장을 버리겠다고 맹세한다면 죄는 사면하게 주겠다고 하는 것이 당시 재판의 결과였다. 이에 갈릴레오는 자신의 주장과 반대되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주장을 포기한다는 각서에 서명하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진 당시의 상황은 이러한데 이것 역시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좀 더 자료를 찾다보면 더 자세한 '사실'을 알수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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